오후 여섯 시 이십 분.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방면 열차.
나타는 손잡이를 잡지 않았다. 손잡이를 잡으면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릴 때부터였는데, 열일곱이 된 지금도 그 이상한 고집은 고쳐지지 않았다. 대신 발을 어깨 너비로 벌리고 무릎을 살짝 구부린 채로 객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퇴근길 인파가 사방에서 밀어붙이는데도 그는 바위처럼 서 있었다. 키가 조금 작아서 양쪽 어깨에서 번갈아 타인의 팔꿈치가 쿡쿡 찔러댔고, 누군가의 쇼핑백이 허벅지를 긁었고, 열차 전체에 군만두 냄새와 화장품 향이 뒤섞여 코를 채웠다.
나타는 아이폰 이어폰을 한쪽만 꽂은 채 창문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교복 셔츠는 이미 세 번째 단추가 풀려 있었고, 머리카락은 오후 내내 바람을 맞아 제멋대로 솟아 있었다. 전학 첫 주치고는 꽤 정상적인 하루였다. 아무것도 폭발하지 않았으니까.
그때 객차 저쪽 끝에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
나타의 귀가 번쩍 섰다.
인파 사이로 시선을 밀어 넣자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검은 후드티를 입은 남자가 오십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의 크로스백 끈을 낚아채 잡아당기고 있었다. 여자는 비틀거리면서도 끈을 놓지 않으려 버텼고, 주변 사람들은 일제히 반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아무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스물두 명이 동시에 자기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타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야."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왔다. 후드 남자의 시선이 튀어올랐다.
"가방 놔."
단순한 문장이었다. 협박도, 설명도, 경고의 말도 붙이지 않았다. 나타는 원래 전제 없이 들어가는 편이었다. 인파를 헤치고 두 걸음, 세 걸음 — 그러다 넷째 걸음에서 발이 멈췄다. 후드 남자가 여자의 끈을 한 번 더 낚아채며 그녀를 앞으로 쓰러뜨렸고, 그 충격으로 여자의 뒤통수가 봉 손잡이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둔탁하고, 선명하고, 객차 전체가 잠깐 정지한 것 같은 소리.
뭔가가 나타의 배 속에서 끓어올랐다.
나중에 그는 그 순간을 설명하려 할 때마다 같은 표현을 썼다. 끓어올랐다. 불이 붙었다는 게 아니었다. 배 깊은 곳에서, 갈비뼈 안쪽 어딘가에서, 뭔가가 액체 상태에서 기체로 변하려고 요동치는 느낌. 손가락 끝이 저렸다.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파란색이었다. 빛이.
나타는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손바닥 위에서 작은 호弧가 타오르고 있었다. 플라스마, 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였는데 그는 그 단어를 아직 몰랐다. 그냥 빛이었고, 열이었고, 자기 안에서 나왔는데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은 무언가였다.
꺼. 꺼꺼꺼.
뇌가 명령을 내렸다. 손이 무시했다.
후드 남자가 가방을 낚아채 문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다음 역이 합정이고 문이 열리면 그대로 사라질 거라는 계산이 얼굴에 써 있었다. 나타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냥 잡으려 했을 뿐이었다.
폭발은 작았다. 객관적으로, 나중에 뉴스에서 '폭발'이라고 표현했을 때 나타는 억울했다. 폭발이라기보다는 방전이었다. 번개가 실내에서 한 번 쳤다고 해야 할까. 파란 빛이 손바닥에서 공기를 타고 뻗어나가면서 객차 천장에 달린 형광등 네 개를 동시에 박살냈고, 비상등이 켜졌고, 후드 남자는 가방을 떨어뜨리고 넘어졌고, 객차 끝쪽 유리창에 지름 삼십 센티미터짜리 그을음 자국이 생겼고, 그리고 — 열차가 멈췄다.
비상 정지.
완전한 어둠. 비상등의 붉은 빛. 그리고 이십 초 정도의 침묵.
그다음에 객차 안 스물두 개의 핸드폰이 일제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나타는 자기 손을 등 뒤로 숨겼다. 너무 늦었다.
합정역 플랫폼은 지옥이었다.
나타는 비상 개방된 문으로 사람들보다 먼저 빠져나왔다. 플랫폼에 대기하던 시민들이 열차를 향해 우르르 몰려오는 반대편으로 어깨를 낮추고 비집고 나갔다. 누군가 등 뒤에서 "저기 파란 불 터진 그 애 아니야?"라고 말하는 게 들렸다. 나타는 더 빨리 걸었다.
에스컬레이터. 개찰구. 계단. 지상.
4월 저녁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미세먼지 주의보가 내렸던 날이라 하늘은 낮고 탁했지만 지하보다는 나았다. 나타는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 편의점 건물 옆 구석으로 몸을 붙였다. 숨을 골랐다. 손을 내려다봤다. 빛은 사라졌고 손바닥은 그냥 손바닥이었다. 약간 데인 것처럼 따끔했다.
핸드폰을 꺼냈다. 알림이 일흔두 개였다. 인스타, 카톡, 학교 단체방, 모르는 번호에서 문자 두 개. 화면을 잠금 해제하기도 전에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 알림이 떴다.
1위: #지하철신남
2위: #SubwayGodBoy
3위: #합정역파란불
나타는 핸드폰을 뒤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좋아. 생각하자. 침착하게.
그는 정면의 편의점 간판을 바라봤다. GS25. 주황색 불빛. 안에서 알바생이 삼각김밥을 진열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세계가 유리 한 장 너머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경찰이 올 것이다. 아마 이미 역에서 cctv를 돌리고 있을 것이다. 학교에는 —
아, 학교.
또 전학이다.
나타는 뒤통수를 편의점 외벽에 기댔다. 하늘이 보였다. 탁하고 주황빛이 도는 서울 하늘. 별은 없었다. 원래부터 없는 건지 먼지에 가린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이번엔 왜 이랬을까.
손이 뜨거워질 때마다 참아왔다. 두 달 전 학교 운동장에서도, 세 달 전 한강 둔치에서도. 뭔가가 올라오면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물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척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아주머니가 넘어지는 소리가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 뇌가 멈추기 전에 손이 움직였다.
잘못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곧바로,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라고도 생각했다.
"라면 먹을래?"
나타가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편의점 주차장 가장자리, 플라스틱 의자 위에 노인이 앉아 있었다. 낚싯대 가방이 옆에 기대져 있었고, 무릎 위에는 뜯어진 컵라면이 놓여 있었다. 교수처럼 생겼는데 낚시꾼처럼 입었다. 등산모자, 방수 조끼, 무릎 위에서 흘러내리는 낚싯대 파우치. 얼굴은 깊은 주름으로 가득했는데 눈이 이상하게 맑았다. 맑다기보다는 — 깊었다. 우물처럼. 바닥이 어디인지 모르는 것처럼.
"저한테 하시는 말씀이세요?"
"주차장에 너밖에 없잖니."
노인이 젓가락으로 라면을 저었다. 밤에 먹는 컵라면 냄새가 공기를 건넜다. 나트륨과 기름기와 뭔가 익숙한 것. 나타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괜찮습니다."
"물이 좀 불었는데."
"진짜 괜찮아요."
노인은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나타를 보지도 않았다. 그냥 라면을 먹었다. 후루룩, 후루룩. 사방이 조용한 골목에서 그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렸다.
나타는 경계를 풀지 않았지만 발은 자기도 모르게 조금 가까이 움직였다.
"아저씨, 혹시 방금 역에서 나오셨어요?"
"아니."
"그럼 여기 얼마나 계셨어요?"
"네가 저 골목으로 뛰어 들어올 때부터."
나타의 발이 멈췄다.
노인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맑고 깊은 눈이 나타를 정면으로 봤다.
"나이가 몇이라고 했더라, 나타야."
공기가 바뀌었다. 온도가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이. 나타의 등줄기에서 한기가 올라왔다. 손가락 끝이 다시 저려오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두려움 때문이었다.
"제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열일곱. 전학 세 번. 편의점 블랙리스트 세 군데." 노인이 라면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두 달 전 상암 운동장에서 골대를 반쯤 녹인 것도 알고. 한강에서 갈매기 깜짝 놀래킨 것도."
"그건 제가 한 게 아니—"
"네가 했어."
단호하지 않았다.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냥 사실을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나타는 입을 닫았다.
노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생각보다 키가 컸다. 낚싯대 파우치를 어깨에 걸었다. 컵라면은 다 비워져 있었다.
"나는 강태공이라 한다. 요즘은 그냥 강 교수라고들 부르더구나."
강태공. 나타는 그 이름을 어딘가에서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역사 시간? 아니면 꿈에서? 정확히 어디서인지는 잡히지 않았다.
"나타야." 노인 — 강태공이 말했다. "너 오늘 지하철에서 뭘 했는지 알지?"
"실수했어요."
"실수가 아냐." 그가 주차장 가로등 불빛 아래로 걸어 나왔다. 빛이 얼굴의 주름을 더 깊게 만들었다. "실수는 처음으로 하는 거다. 넌 오늘 마지막으로 한 거야."
"무슨 뜻이에요."
"오늘 일이 첫 번째 징후가 아니란 뜻이야. 마지막 경고였다는 뜻이지."
나타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그 말이 — 맞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배 속에서 뭔가가 그 단어에 공명했다. 종이 울리는 것처럼.
강태공이 주차장 가장자리에 서서 나타를 기다렸다.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수천 년을 기다려본 사람의 자세였는데 나타는 그 생각을 왜 했는지 나중에도 설명하지 못했다.
"저를 왜 여섯 달이나 지켜봤어요." 나타가 물었다.
"네가 준비되길 기다렸으니까."
"제가 준비됐어요?"
"아니." 강태공이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졌어."
나타는 그 말을 씹었다. 시간이 없어졌어. 뭔가 무서운 말인데 왜 저 노인 입에서 나오면 라면 끓었다는 말처럼 들리는 걸까.
"어디 가자는 거예요."
"보여줄 게 있어."
"제가 거기 따라가야 할 이유가 있어요?"
강태공이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게 미소인지 아닌지 알기 어려웠다.
"안 따라와도 돼. 그냥 여기 있으면 돼." 그가 말했다. "다음 폭발은 지하철보다 클 거야. 그리고 그때는 네가 아무리 손을 등 뒤에 숨겨도 소용없을 거고."
나타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협박이에요?"
"그게 사실이야."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편의점 안 냉장고 모터 소리가 웅웅 들렸다. 멀리서 경찰차 사이렌이 가까워지다 멀어졌다. 나타는 주머니 속 핸드폰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알림이 또 왔을 것이다. 학교에서 연락이 왔을 것이다. 아마 내일 아침 교무실에 불려갈 것이다. 또.
그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탁하고 별 없는 서울 하늘. 여전히.
"제가 선택권이 있기는 한 거예요?"
"항상 있지." 강태공이 말했다. "다만 지금 네 앞에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야. 나를 따라오거나, 다음 사고가 날 때까지 기다리거나."
"그건 선택지가 아니라 협박이잖아요." 나타가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는데."
강태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기다렸다.
나타는 발을 굴렀다. 한 번, 두 번.
"어디까지 가는 건데요?"
"마포."
"마포 뭐요."
"찜질방."
나타가 눈살을 찌푸렸다. "찜질방이요."
"응."
"그게 다예요? 그냥 찜질방?"
"응."
나타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다시 열었다가 또 닫았다. 뭔가 반박하고 싶었는데 찜질방에 대해서 반박할 논리가 없었다. 찜질방은 그냥 찜질방이었다. 나타가 모든 인생에서 경계해야 할 것들의 목록 안에 찜질방은 없었다.
"진짜 찜질방이에요?"
"진짜 찜질방이야."
"거기서 뭘 보여준다는 거예요."
"가보면 알아."
나타는 열다섯 걸음쯤 더 생각했다. 정확히는 그 정도 분량의 반박과 재반박과 포기를 뇌 안에서 반복했다.
그러고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강태공의 옆으로 걸어가 섰다. 노인보다 반 뼘 작았다. 그게 괜히 짜증났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나타가 말했다. "저 따라가는 거 아니에요. 그냥 같은 방향으로 가는 거예요."
"알았다."
"그리고 이상한 데 데려가면 바로 튀어요."
"그럼."
"아직 제 이름 어떻게 알았는지도 안 말씀해줬잖아요."
"가면서 얘기하지."
강태공이 먼저 걷기 시작했다. 낚싯대 파우치가 등에서 흔들렸다. 나타는 세 걸음 늦게 뒤따랐다. 두 걸음. 한 걸음. 결국 나란히.
골목 입구를 빠져나오는 순간, 나타는 뒤를 한 번 돌아봤다. 편의점 간판이 주황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그는 앞을 봤다. 강태공이 걸었다. 서울 밤거리가 양옆으로 열렸다. 어딘가에서 치킨 냄새가 났고, 버스 한 대가 옆을 스쳐 지나갔고, 편의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아이돌 노래가 멀어졌다.
나타는 손을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은 채로 걸었다. 손바닥이 아직 약간 따뜻했다.
마지막 경고, 라고 강태공이 말했다.
마지막이라면 — 그 전에 뭔가 처음이 있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처음이 있었다면 나타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게 무서운 건지 신나는 건지 아직은 판단이 안 됐다.
둘은 마포 방향으로 걸었다. 서울 밤은 별 없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