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강남구 논현동 뒷골목, 간판도 없는 지하 계단을 내려가면 형광등 불빛이 노랗게 번지는 방이 하나 있었다. 탁자 위에 화투패가 깔리고, 담배 연기가 천장을 기어 다니고, 군데군데 얼룩진 벽지 아래로 돈 냄새와 땀 냄새가 뒤엉켜 있었다. 이런 데가 세상에 없어질 것 같아도, 이런 데는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위소보는 그 사실을 뼛속으로 알고 있었다.
"야, 소보야. 패 돌려."
"예, 예, 드리죠."
위소보—본명 위성철이나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어머니뿐이었다—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키는 평범했고, 얼굴은 준수하다기보다는 어딘가 영리해 보이는 쪽이었으며, 눈빛만큼은 언제나 화투패보다 사람을 향해 있었다. 논현동 골목에서 태어나 이 골목에서 자란 그는, 이 방에서 판돈을 긁어모으는 것이 생업인지 취미인지 스스로도 구분하지 못한 채 오늘도 앉아 있었다.
오늘의 판은 작았다. 손님이 셋이었는데, 하나는 동네 부동산 중개인, 하나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양복쟁이, 나머지 하나는 방금 전까지 졸다가 자기 판돈이 사라지고서야 눈을 뜬 노인이었다. 위소보는 판을 관리하는 입장이었지만, 실제로는 군데군데 끼어들어 판세를 읽고 몇 마디씩 거들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언제나 중립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판을 오래 끌어 수수료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누가 봐도 티가 날 법했지만, 화투패 앞에서 사람들은 대개 옆자리 사람보다 자기 패에 더 집중하는 법이다. 그것이 도박판의 불변하는 진리였다.
비가 세지기 시작한 것은 오후 세 시쯤이었다.
빗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던 그때, 위쪽 문이 거칠게 열리며 사내 하나가 굴러 들어오다시피 했다. 쉰 살은 족히 돼 보이는 남자였는데, 넥타이가 한쪽으로 비틀려 있고, 재킷 어깨는 빗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이마의 땀이 빗물과 섞여 흘러내렸다. 눈빛이 사방을 훑는 것이, 쫓기는 사람 특유의 눈빛이었다.
위소보는 화투패에서 시선을 들지 않은 채 그 남자를 훑었다.
양복은 비쌌다. 손목시계는 더 비쌌다. 그러나 신발 밑창이 닳아 있었고, 왼쪽 주머니가 볼록했다—두꺼운 서류봉투 모양이었다. 계단을 내려올 때 오른발을 먼저 짚었다는 것은, 이 장소에 처음 오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혹시…" 남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오 실장 여기 있어요?"
위소보는 그때서야 패를 내려놓았다.
오 실장. 오학수. 논현동 이 판에서 두 달 전부터 가끔 모습을 드러내던 사내였다. 말수가 적고, 판돈은 크게 걸지 않았으며, 이긴 날보다 잃은 날이 훨씬 많았다. 위소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그가 가끔 쓰는 표현들 때문이었다. 예산 절충, 수석 보좌, 행정관 회의.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는 단어들이었으나, 위소보의 귀에는 유독 잘 걸렸다.
"안 오셨는데요." 위소보가 말했다. "무슨 일이세요?"
"아, 그게…" 남자가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거, 오 실장한테 좀 전해줄 수 있어요? 오늘 꼭 받아야 하는 거라서."
위소보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얇았다. 그러나 안에서 뭔가 빳빳한 것이 느껴졌다—종이 한 장. 그 무게로 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그러나 위소보는 도박판에서 산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경우를, 그는 너무 많이 봐왔다.
"이름이요?" 위소보가 물었다.
"박 대리라고요. 오 실장이 알아요."
남자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한 시간 뒤, 오학수가 왔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 평소에도 말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오늘은 침묵의 밀도가 달랐다. 그는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위소보를 찾았다.
"박 대리 왔다 갔어요?"
"예." 위소보가 봉투를 건넸다.
오학수는 봉투를 받아 열었다. 종이 한 장을 꺼내 보더니, 표정이 일순 굳었다. 위소보는 그 굳어지는 각도를 정확하게 포착했다. 안도감과 수치심이 동시에 지나가는 얼굴이었다.
슬립이었다. 경마 배팅 슬립. 그리고 오학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 오학수가 짧게 말했다.
위소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학수가 봉투를 다시 접으려는 찰나, 계단 위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쿵쿵 내려왔다. 두 개였다. 아니, 셋이었다. 위소보는 발소리만으로도 그 무게중심이 어디에 실려 있는지 읽는 버릇이 있었다. 일 잘하는 사람들의 걸음과 빚 받으러 오는 사람들의 걸음은 확연히 달랐다.
빚 받으러 온 사람들이었다.
문이 열리고, 목이 굵은 남자가 들어서며 방 안을 둘러봤다. 오학수를 발견하자마자 표정이 바뀌었다. 웃음이 아니었다. 입꼬리가 올라갔으나 눈이 전혀 웃지 않는, 그런 종류의 표정이었다.
"오 실장님, 여기 계셨네요."
화투판에 앉아 있던 나머지 손님 셋이 조용히 패를 내려놓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도 끼어들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율이 이 방에는 있었다.
오학수의 손이 약간 떨렸다. 아주 약간이었으나, 위소보는 그것을 봤다. 봉투를 쥔 손가락 끝이 흰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위소보는 그 순간,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세 가지쯤 머릿속에서 굴렸다. 빠른 계산이었다. 이 남자에게 빚이 있다. 저 슬립이 그 빚의 일부를 해결할 만한 당첨금이라는 뜻이다. 저 목 굵은 남자들이 그것을 알고 쫓아왔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오학수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실장님."
위소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마치 자신이 이 자리에서 뭔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인 것처럼.
"손님 오셨는데 인사부터 받으시죠. 오늘 미팅 스케줄이 좀 빡빡하게 잡혀서요."
목 굵은 남자가 위소보를 바라봤다. "당신 누구야?"
"저요?" 위소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 실장님 보좌 쪽으로 일합니다. 청와대 행정관실인데, 명함을 지금 다 동나서—" 그는 빈 주머니를 한 번 툭툭 두드렸다. "다음에 드릴게요."
청와대.
그 단어가 방 안의 공기를 바꿨다. 화투패를 내려다보던 부동산 중개인의 눈이 슬쩍 위로 올라왔다. 목 굵은 남자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오학수는 위소보를 바라봤다. 당혹과 경계가 섞인 눈빛이었으나, 지금 이 상황에서 선택지가 없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래요." 오학수가 한 박자 늦게 말을 받았다. "바쁜 날이라서. 중요한 건 다음 주에 다시 얘기하죠."
목 굵은 남자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뒤에 선 두 사람을 돌아보고, 다시 오학수를 봤다. 청와대라는 단어 하나가 이 방에서 가진 무게를, 위소보는 아주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었다.
"다음 주 금요일." 목 굵은 남자가 말했다. "꼭이요."
발소리가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셋이서 내려왔던 그 발소리로.
방 안이 조용해졌다.
오학수는 한참 동안 봉투를 내려다봤다. 그러다가 위소보를 바라봤다.
"고맙소."
"별말씀을요." 위소보가 웃었다. 그 웃음은 무해했다. 아주 무해했다. 적어도 표면에서는.
비가 그쳤다.
골목 계단 위에서 젖은 아스팔트 냄새가 내려왔다. 오학수는 봉투를 재킷 안쪽에 넣으며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위소보는 자연스럽게 옆에 나란히 걸었다.
"실장님, 여기 자주 오세요?"
"가끔."
"저도 가끔 오거든요." 위소보가 말했다. "근데 아까 말씀은, 뭐 진짜 청와대라는 건 아니고, 그냥 상황이 그러니까—"
"알아요." 오학수가 짧게 말했다.
"예."
계단 끝에 다다랐을 때였다.
위소보가 불쑥 말했다.
"실장님, 저 청와대 한 번만 들어가볼 수 있을까요?"
오학수가 멈췄다. 돌아보는 얼굴에 '이 사람이 지금 뭔 소리를'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거기를 왜."
"구경이요." 위소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한 번 보고 싶었어요. 뉴스에서만 봤거든요. 실장님, 방금 제가 큰 도움이 됐잖아요. 현금 같은 건 필요 없고요, 그냥 임시 출입증 하나만요. 딱 하루만."
오학수는 위소보를 한참 바라봤다. 이 젊은 사람이 도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건지 가늠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계산이 나왔을 때는 이미, 자신이 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빚 독촉 앞에서 아무 이유 없이 나서준 사람에게, 거절의 명분이 서지 않았다.
"임시방문증이요." 오학수가 말했다. "그것도 당일치기."
"충분합니다." 위소보가 고개를 꾸벅했다.
오학수는 한숨을 짧게 내쉬고 계단을 올라갔다.
위소보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딱 하루라고 했다. 그러나 일단 들어가면 어떻게든 되는 것이 세상 이치였다. 도박판에서도 그랬다. 첫 판은 구경으로 시작했으나 결국 판을 뒤집은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사흘 뒤 오전 열 시.
경복궁 담장을 끼고 청운동 쪽으로 올라가면 나오는 검문소 앞에 위소보가 섰다. 오학수에게 받은 임시방문증을 손에 쥐고 있었다. 방문증은 얇은 종이 한 장이었고, 거기에는 방문 목적란에 '행정 자료 수령'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게 무슨 자료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아마 오학수도 몰랐을 것이다.
첫 번째 검문 초소.
경비원이 방문증을 받아 들고 이름을 컴퓨터에 입력했다. 잠시 화면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들었다.
"소속이요?"
위소보는 잠깐 생각했다. 0.3초.
"비서실 행정지원팀입니다." 그가 말했다. "오학수 실장님 쪽이요."
경비원이 다시 화면을 봤다. 오학수의 이름 옆에 출입 관련 항목이 있는 것 같았다.
"잠깐 기다려주세요."
위소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문소 옆 벤치에 앉았다. 앉는 방식이 자연스러웠다.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이는 동시에,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처럼 보이도록. 그것은 의식적인 계산이 아니었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전화기 소리가 났다. 경비원이 수화기를 들고 뭔가 짧게 확인했다. 내려놓고, 도장을 찍어 방문증을 돌려줬다.
"들어가세요."
첫 번째 관문.
두 번째는 본관 입구 쪽 보안 게이트였다. 여기서는 가방 검사와 신분 대조가 동시에 이뤄졌다. 담당 직원이 위소보의 신분증과 방문증을 번갈아 봤다. 미심쩍다는 표정이었다.
"행정지원팀이면 보통 이쪽으로 오지 않는데요."
위소보는 짧게 눈썹을 찌푸렸다. 당황한 게 아니었다. 확인해야 할 것을 상대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약간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오학수 실장님이 동쪽 별관 서류를 지금 긴급으로 필요하신다고요. 수석 회의 전까지." 그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한 시간 남았습니다."
수석 회의. 긴급. 한 시간.
그 세 단어가 이 건물 안에서 가진 중력이 있다는 것을, 위소보는 들어오기 전날 밤에 공중파 뉴스를 두 시간 보면서 파악해 두었다.
담당 직원이 잠깐 망설이다가 게이트를 열었다.
두 번째 관문.
세 번째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났다. 본관 복도를 지나다 마주친 나이 지긋한 여성 직원이었다. 배지 색깔이 달랐다—위소보가 받은 임시방문증의 색과 구역이 맞지 않는 쪽으로 걷고 있다는 것을, 그 여성은 직업적 눈으로 바로 알아챈 것 같았다.
"잠깐요. 어디 가세요?"
위소보는 멈췄다. 환하게 웃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가 약간 당황한 척 머리를 긁적였다. "처음 와봐서요. 오학수 실장님 비서 분이 이쪽이라고 하셔서—"
"오 실장님 비서는 저예요."
위소보는 0.5초 동안 이 상황을 통째로 재편했다.
"아, 맞다!" 그가 손바닥을 탁 쳤다. "목소리가! 아까 전화로 얘기하셨잖아요, 서류 가지고 오라고. 이름이—" 그는 일부러 말을 흐렸다.
"박 주임입니다."
"맞아요, 박 주임님." 위소보가 고개를 꾸벅했다. "반갑습니다. 얼굴 뵙고 싶었어요."
박 주임은 그를 한 번 더 훑었다. 경계심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으나, 이름을 스스로 밝히게 한 것—그리고 상대가 그 이름을 바로 받아친 것—이 어떤 확인처럼 작용하는 모양이었다.
"따라오세요."
세 번째 관문.
박 주임은 위소보를 오학수의 집무실 앞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다. 위소보는 그 자리에서 오학수를 만났고, 오학수는 그를 보자마자 얼굴이 굳었다.
"진짜 왔어요?"
"말씀드렸잖아요." 위소보가 웃었다.
"볼일 보고 나가요. 여기는 막 돌아다닐 데가 아니에요."
"알죠, 알죠." 위소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요."
그는 오학수의 집무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마당을 내다봤다. 봄비가 그친 뒤의 잔디가 짙은 초록으로 빛나고 있었다. 건물들이 낮고 넓게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말쑥한 양복들이, 두꺼운 서류들을 들고, 목적 있는 걸음으로.
위소보는 그 풍경을 바라봤다.
강남 뒷골목 형광등 아래와는 다른 종류의 공기가 여기 있었다. 돈 냄새는 비슷했다. 그러나 그 돈이 흐르는 방향이 달랐다. 훨씬 크고, 훨씬 조용하고, 훨씬 오래가는 방향으로.
그가 평생 화투판에서 읽어온 것들—누가 쥐고 있고, 누가 버리려 하고, 누가 속이고 있는지—그 모든 것이 여기서도 똑같이 작동하고 있었다. 판만 달랐다.
위소보는 그것을 봤다.
"나 좀 있다 나갈게요." 그가 오학수에게 말했다.
"얼마나요?"
위소보는 창밖을 한 번 더 바라봤다.
"글쎄요," 그가 말했다. "일단은요."
그는 그날 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