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일곱 시, 한강이 창 너머에서 빛을 팔고 있었다.
가보옥은 눈을 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눈꺼풀이 열렸다. 본인의 의지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했다. 이탈리아산 실크 커튼이 아침 햇살을 삼분의 일쯤 허락하고 있었고, 그 삼분의 일이 침실 바닥에 길고 무의미한 사각형을 그리고 있었다. 보옥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은 어제와 동일했다. 그제와도 동일했다. 아마 내일도 동일할 것이었다.
시트가 손에 닿았다. 이집트산 면, 오백 수, 세탁소에서 풀을 먹여 돌아온 것. 몸이 닿는 순간 서늘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피부를 스쳤다. 이 촉감이 좋은 것인지 그는 오래전에 판단하기를 멈췄다. 좋다고 느끼기에는 너무 당연했고, 싫다고 느끼기에는 너무 오래된 것이었다.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신는 데 걸리는 시간은 사 분이었다. 이 사 분 동안 그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슬리퍼는 발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발은 자동으로 그 안에 들어갔다. 누가 놓아두었는지는 몰랐다. 물어본 적이 없었다.
욕실 거울 앞에서 가보옥은 자신의 얼굴을 이 초쯤 들여다보았다. 서른한 살, 가씨 그룹 창업주의 외손자이자 현 회장의 외아들, 어느 경제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한민국 재계가 기대하는 젊은 피'. 거울 속 얼굴은 그 모든 수식어에 비해 지나치게 조용했다. 어딘가 핀트가 나간 사진처럼, 피사체가 셔터 소리를 미처 듣지 못한 것처럼.
그는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었다. 냉수가 손바닥을 가득 채웠다. 차가웠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다이닝룸에 도착했을 때 설보채는 이미 앉아 있었다. 크림색 니트, 단정하게 묶은 머리, 커피잔이 그녀의 오른쪽에 놓여 있었고 잔에는 아직 김이 올라왔다. 그녀는 태블릿으로 무언가를 읽고 있었는데, 보옥이 들어서는 소리에 정확히 고개를 들고 미소 지었다. 타이밍이 너무 완벽해서 잠깐 연습을 한 것인가 싶었지만, 보옥은 그런 생각을 한 것을 곧 부끄러워했다. 그녀는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 모든 타이밍이 완벽한 사람.
"잘 잤어요?"
"응."
그는 자신의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아침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두 종류의 과일, 요거트, 잡곡빵, 수란, 허브를 얹은 훈제 연어. 누가 먹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양이었다. 두 사람이 매일 이 테이블 앞에 앉고, 매일 절반쯤 남겼고, 그것은 매일 치워졌다.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사십삼 층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한강은 강이라기보다는 개념에 가까웠다. 물이 흐른다는 개념. 저 아래에 사람들이 산다는 개념. 보옥은 창가 쪽으로 몸을 약간 기울였다. 강 건너 아파트 단지가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저 아파트에 살고 싶다고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저쪽에서 이쪽을 올려다보면 어떤 기분일까, 하고 잠깐 생각했을 뿐이었다.
"식사해요."
설보채가 말했다. 권유인지 지시인지 불분명한 톤으로. 보옥은 포크를 들었다. 수란이 차가웠다.
그는 먹었다. 먹는 행위를 수행했다는 편이 더 정확했다.
같은 시각, 서울 관악구의 어느 반지하 고시원에서 임대옥은 알람보다 먼저 눈을 떴다.
눈을 뜨면 천장이 보여야 했는데, 천장이 너무 낮아서 천장이라기보다는 뚜껑에 가까웠다. 그 뚜껑이 그녀에게 매일 아침 동일한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오늘도 여기 있을 거야? 그녀는 오늘도 대답 대신 몸을 일으켰다.
방은 두 걸음이면 끝이었다. 정확히는 두 걸음 반이지만, 문 앞에 짐이 있어서 두 걸음이 되었다. 그 짐은 이사용 박스 두 개와 전공 서적 한 묶음과 빨래 바구니였는데, 대옥은 오래전에 그것들을 짐이라고 부르기를 포기하고 가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적어도 가구는 있는 편이 나으니까.
창문은 천장 가까이 달려 있었다. 정확히는 방의 위쪽 끝, 지면에서는 겨우 발목 높이가 되는 위치. 유리 너머로 행인들의 발이 보였다. 흰 운동화, 검은 구두, 누군가의 슬리퍼. 오전 일곱 시의 거리는 발목들로 바빴다. 대옥은 그 발목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이 지금 어디를 향하는지, 어디에서 자고 일어났는지, 단 한 번도 지하에 사는 사람이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지 생각했다. 아마 없을 것이었다. 그게 정상이었다.
세면대는 복도 끝에 있었다. 대옥은 수건을 들고 방을 나섰다. 복도는 좁았고 형광등이 하나 깜빡이고 있었는데, 깜빡이는 주기가 어제와 달랐다. 더 빨라졌다는 것은 교체가 임박했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메모해야 하나 생각했다가, 메모해봤자 관리인이 들어줄 가능성을 재빠르게 계산하고, 그냥 지나쳤다.
찬물로 세수를 했다. 온수는 오전 아홉 시부터 나왔다. 그 전에 나가야 하는 날이 더 많았으므로 대옥은 오래전에 찬물 세수에 적응했다. 적응이라는 단어가 패배처럼 느껴졌던 것도 오래전 일이었다.
방으로 돌아와 편의점 삼각김밥을 먹었다. 어제 사둔 것, 할인 스티커가 붙어 있던 것. 차가운 밥알이 입안에서 풀렸다. 맛은 없었고 배는 채워졌다. 충분했다.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서류 봉투 하나가 있었다. 서류 봉투 안에는 이력서 두 장과 자기소개서, 그리고 지원서가 들어 있었다. 지원서의 상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가씨 그룹 자제분 가정교사 채용 공고 — 인문학 과외 및 고전 문학 교양 지도.
대옥은 그 서류를 어젯밤에 다섯 번 고쳐 썼다. 이력서의 학력란에는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수석 졸업, 동 대학원 수료라고 적혀 있었다. 스펙은 충분했다. 문제는 스펙이 충분한 사람이 이런 공고에 지원해야 하는 상황이 어떤 종류의 아이러니인지, 면접관이 알아채지 못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알아채면 그것도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공고는 없었다.
그녀는 봉투를 가방 안에 넣었다. 가방은 대학원 시절부터 쓰던 것으로, 손잡이 쪽 실이 조금 뜯어져 있었다. 그 옆에 얇은 책 한 권을 나란히 꽂았다. 표지가 손때로 닳은 시선집이었다. 가방을 어깨에 걸 때 손잡이의 뜯어진 부분이 손가락에 걸렸다. 대옥은 그것을 무시하고 방문을 열었다.
복도의 깜빡이는 형광등이 그녀가 지나가는 순간 잠깐 정상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깜빡였다.
가씨 그룹 본사는 여의도였지만 가보옥이 그날 오전 도착한 곳은 성수동의 문화재단 사무실이었다. 어머니가 그를 거기에 앉혀두었기 때문이었다. 재단 이사 직함, 주 이 회 출석, 서명이 필요한 서류들. 그는 지정된 자리에 앉아 지정된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창밖으로 성수동의 거리가 내려다보였다. 카페들, 빈티지 숍들, 오래된 공장을 개조한 건물들.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느 골목을, 어느 낡은 벽을, 어느 간판을. 낡은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그 낡음 속에서 살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는 것을, 보옥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 무언가를 느끼기에는 에너지가 부족했다. 오늘도. 어제도.
비서가 다음 서류를 가져왔다.
"이쪽도 서명 부탁드립니다."
보옥은 펜을 들었다. 사인 한 줄. 가보옥, 세 글자. 그 세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구속력을 갖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다는 것이 편안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 또한.
점심은 재단 임원들과 함께였다. 한우, 산지 직송, 서비스로 나온 육회. 식탁에서 오간 대화는 주로 보옥에 관한 것이었는데, 보옥이 주어로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의 어머니 마담 가의 계획, 가씨 그룹의 미래, 설보채와의 결혼 이후 구도. 보옥은 고기를 씹으며 그 모든 것을 들었다. 아니, 귀에 들어왔다. 들었다는 것과 귀에 들어왔다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밖에 나왔을 때 오후의 햇살이 보도블록을 뜨겁게 덥히고 있었다. 운전기사 오광수가 차 앞에 서 있었다. 이십 년 된 사람,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 보옥은 차에 올라타며 물었다.
"광수씨, 오늘 어디 가고 싶어요?"
오광수는 룸미러 안에서 잠깐 눈을 깜빡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니, 내가 아니라 광수씨 말이에요. 오늘 어디 가고 싶냐고."
잠시 침묵이 있었다.
"저는 모시는 곳으로 가면 됩니다."
보옥은 창밖을 보았다. 그렇겠지, 라고 생각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차가 출발했다. 한강대교를 건너며 보옥은 강을 내려다보았다. 오전에 사십삼 층에서 내려다본 강과 같은 강이었다. 하지만 같은 강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위에서 보나 옆에서 보나 같은 것인데, 왜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이는 걸까. 그는 이 질문도 끝까지 가져가지 않았다. 어차피 대답할 사람이 없었다.
오후 두 시, 임대옥은 신촌의 카페에서 노트북을 펼쳐놓고 또 다른 지원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가씨 그룹 가정교사 외에 두 곳의 학원과 한 곳의 대학 입시 컨설팅 업체에 지원한 상태였다. 카페 아메리카노는 이천오백 원이었고, 리필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잔이 빌 때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자기소개서 마지막 문단이 문제였다. 지원 동기를 쓰는 칸. 그녀는 지원 동기가 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돈이라고 쓸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으므로, 그 사이 어딘가에서 그럴듯한 언어를 찾아야 했다.
그녀는 타자를 쳤다.
문학은 언어로 세계를 이해하는 행위입니다. 저는 그 행위를 학생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전부도 아니었다. 그게 자기소개서라는 장르의 규칙이었다.
가방 안에서 시선집이 보였다. 손때 묻은 표지, 귀가 접힌 페이지들. 대옥은 가끔 이 책을 펼쳐 무작위로 읽었다. 오늘 오전에도 지하철 안에서 펼쳤다가, 이백여 년 전 시인의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눈물 흘릴 곳도 없어 바람에 실려 하늘 끝으로 가는구나.
그녀는 그 구절을 읽고 책을 덮었다. 지하철은 구로를 지나고 있었다.
가씨 그룹 지원서를 다시 읽었다. 마감은 이틀 후였다. 연락이 오면 면접을 보러 가야 했다. 사십삼 층 펜트하우스에, 강남에, 자신이 한 번도 서본 적 없는 높이에. 그 생각을 했을 때 무엇을 느꼈는지는 스스로도 정확하지 않았다. 긴장인지 경멸인지 욕망인지. 아마 셋 다였을 것이다. 아마 그게 정직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소개서의 마지막 문단을 한 번 더 읽고, 저장을 눌렀다. 전송 버튼 위에 커서가 잠깐 머물렀다. 이천오백 원짜리 아메리카노 잔 바닥에 커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창밖으로 신촌 로터리의 오후가 소란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전송.
화면에 접수 완료 메시지가 떴다. 대옥은 노트북을 닫고 가방을 챙겼다. 카페 문을 열자 바깥의 열기가 얼굴을 덮쳤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햇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서울은 오늘도 위와 아래가 따로 존재했다. 그 두 층은 같은 하늘 아래 있었고, 같은 강을 끼고 있었고, 같은 여름을 통과하고 있었다. 다만 한쪽에서는 수란이 식어가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삼각김밥 할인 스티커를 계산하고 있었다. 아무도 이것을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오래된 일이었다.
한강은 그 모든 것의 아래를 유유히 흘렀다. 위에서 보나 옆에서 보나 같은 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