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하진 시내로 들어서는 순간, 양진우는 눈을 떴다.
잠든 것도 아니었다. 그는 청주에서 버스에 오른 뒤 두 시간 내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앞에 두는 것이었다. 강원도의 11월 들판은 색을 잃은 지 오래였다. 논두렁은 검고 산등성이는 회색이었으며, 간간이 지나치는 마을들은 지붕만 낮고 빈 듯이 서 있었다. 차창에 입김이 서렸다. 진우는 그것을 닦지 않았다.
터미널에 들어서는 버스의 엔진이 낮게 기침했다. 좌석에서 몸이 앞으로 쏠렸다. 진우는 그제야 코트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 서류 봉투를 확인했다. 봉투는 거기 있었다. 접힌 자리가 이미 부드럽게 닳아 있었다. 그는 펴보지 않았다. 봉투 안의 내용은 외우고 있었다.
발령 기간: 1997년 11월 1일부터 1998년 4월 30일까지. 근무지: 하진청각장애인학교. 담당 업무: 보조교사. 특기 사항: 없음.
여섯 달짜리 자리였다. 복지과 담당자가 그것을 꺼낼 때 잠깐 시선을 피한 것을 진우는 기억했다.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자리였다. 담당자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진우는 평생 그런 것들을 읽으며 살아왔다.
"괜찮습니다," 진우가 말했었다.
담당자는 안도하는 얼굴을 서둘러 감췄다.
터미널 바깥으로 나오자 찬 공기가 얼굴을 건드렸다. 매캐하지도 않고 날카롭지도 않은, 그냥 차가운 공기였다. 하진은 냄새가 없는 도시였다. 적어도 11월에는. 진우는 배낭을 고쳐 메고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걸었다.
도시는 기억보다 작았다.
마지막으로 하진에 온 것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아니면 5학년. 설날이었던가 추석이었던가. 고모 강미숙의 집은 중앙로에서 두 블록 들어간 골목에 있었고, 천 가게는 큰길가에 있었다. 진우는 그때 그 가게 앞에 서서 유리창 너머로 색색의 천 더미를 들여다본 기억이 있었다. 비단 원단에 형광등 불빛이 반짝이던 것. 고모부가 진우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 두드림은 가볍고 빠른 것이었다. 부담 없는 온기, 그리고 즉각적인 철수.
중앙로로 들어서자 간판들이 보였다. 약국, 이발소, 슈퍼마켓. 가게들은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모두 조금씩 작았다. 강미숙 천 가게는 약국 두 칸 건너에 있었다. 유리창 안쪽으로 마네킹이 보였고, 카운터 뒤에 머리를 파마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고모였다. 아니, 고모가 아닐 수도 있었다. 뒷모습이었으니까.
진우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가게 앞을 지나치면서 그는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했다. 발소리는 균등했다. 주머니 속에서 손이 주먹을 쥐었다가 펴졌다. 가게는 등 뒤로 멀어졌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전화는 하면 될 일이었다. 자리를 잡고 나면. 아직은 자리가 없었다.
학교로 올라가는 길은 시내에서 걸어서 이십 분이었다. 복지과에서 받은 약도에는 '시 외곽 북쪽, 소나무 군락 지나 좌회전'이라고 적혀 있었다. 약도를 그린 사람이 거리 감각이 없는 사람인지, 아니면 진우가 그런 사람인지, 소나무 군락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어야 나타났다.
오르막이었다. 포장이 된 길이었지만 군데군데 아스팔트가 들려 있었다. 길가에 마른 억새가 서 있었고,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억새들이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숙였다가 돌아왔다. 진우는 배낭 끈을 고쳐 잡으며 걸었다. 발 아래서 작은 돌멩이들이 밀렸다. 하늘은 낮고 무거웠다. 구름인지 연기인지 분간이 안 가는 회색이 수평선 위에 납처럼 깔려 있었다.
소나무 군락에서 왼쪽으로 꺾으니 돌담이 나타났다.
오래된 담이었다. 돌들이 고르지 않았고 군데군데 이끼가 앉아 있었다. 담은 길을 따라 꽤 길게 이어졌고, 그 끝에 철제 대문이 있었다. 대문 기둥에 금속 표지판이 달려 있었는데, 녹이 슬어 글자의 획이 번져 있었다. '하진청각장애인학교.' 진우는 멈추어 서서 그것을 읽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 앞에 서본 적이 없었다. 확실했다. 그런데 돌담의 결, 녹슨 표지판의 기울기, 대문 너머로 보이는 낡은 건물 지붕의 선이, 어딘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꿈 속에서 보던 풍경이 이런 것이었다. 선명한 꿈이 아니라 깨고 나면 잡히지 않는, 그러나 특정 순간에 불현듯 냄새처럼 되살아나는 그런 것. 진우는 그 감각을 이름 붙일 수 없었다. 오래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류의 감각들을 오래 붙들고 있으면 쓸모없는 데 힘이 낭비되었다.
그는 대문 옆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삐 소리. 그리고 정전기 낀 목소리.
"누구세요?"
"하진청각장애인학교 보조교사로 발령받은 양진우입니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진우는 기다렸다. 무거운 배낭 끈이 왼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들어오세요."
대문이 느리게 열렸다.
교장 건물은 정문에서 안쪽으로 들어가 왼편에 있었다. 진우는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운동장은 비어 있었다. 화요일 오전이니 수업 중이겠거니 했다. 철봉과 시소가 녹이 슨 채로 서 있었고, 그 옆에 작은 화단이 있었는데 11월이라 흙만 보였다. 화단 가장자리에 돌을 둘러놓은 것이 보였다. 누군가 꽤 공을 들여 놓은 돌들이었다.
행정실에서 발령 서류를 제출하고 교장실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진우는 복도 벽에 붙은 아이들의 그림들을 보았다. 크레파스로 그린 것들이었다. 집, 나무, 사람. 그림 속 사람들은 대부분 손을 들고 있었다. 흔드는 것인지,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손짓들이었다.
교장은 자리에 없었다.
대신 교감 한정호가 나왔다. 오십대 중반의 남자로, 안경 너머 눈이 피로해 보였다.
"어렵게 오셨어요. 먼 데서."
"청주에서 왔습니다."
"청주." 한정호는 그것을 메모하는 시늉을 했다. "아, 그러셨군요."
관심 없다는 뜻이었다. 진우는 그것을 원망하지 않았다. 교감은 서류를 훑어보고 도장을 찍고, 진우에게 교직원 명단과 학교 배치도가 들어 있는 봉투를 내밀었다. 숙소는 교직원 별관 2층이고 저녁은 교직원 식당에서 먹으면 되고 내일부터 오전 9시에 담당 교사를 찾으면 된다고 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감정이 없었다. 행정적 온도, 그것뿐이었다.
"궁금한 것 있으세요?"
진우는 잠깐 생각했다.
"없습니다."
한정호는 안도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복도 끝 별관 방향을 가리키며 고개를 돌렸다. 면담은 끝났다.
별관 복도에는 리놀륨 바닥이 깔려 있었다. 낡아서 가장자리부터 들려 있었다. 2층 복도 끝방이 진우의 방이었다. 방 안에는 단대 침대, 작은 책상, 금속 옷장이 있었다. 창문으로 운동장이 보였다. 진우는 배낭을 침대 위에 내려놓고 코트를 벗었다. 그는 잠깐 서 있었다. 방은 차가웠다. 라디에이터가 있기는 했지만 아직 따뜻해지기 전이었다.
그는 서류 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6개월. 이 방에서 6개월을 살 것이다. 아무도 오지 않으려 한 곳.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은 곳. 진우는 그것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고 생각했다. 속하지 않는 것. 그것이라면 오래 연습했다.
창밖으로 운동장이 보였다. 바람이 지나가면서 운동장 흙을 조금씩 쓸어갔다. 철봉이 가늘게 흔들렸다. 진우는 오래 그것을 바라보았다.
돌담 앞에서 느꼈던 감각이 아직 손끝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꿈 속에서 본 듯한 풍경. 그는 그것에 이름을 붙이려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이름을 붙이면 실체가 생기고, 실체가 생기면 기대가 따라왔다. 기대는 진우가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그는 배낭 지퍼를 열었다. 첫 번째로 꺼낸 것은 수건이었고, 두 번째는 세면도구 파우치였다. 세 번째는 책이었다. 사회복지 관련 논문 복사본들이 스테이플러로 묶여 있었다. 그는 그것을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바깥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수업이 끝나는 종이었다. 그러고 나서 복도 어딘가에서 발소리들이 났다. 여러 명의, 그러나 이상하게 조용한 발소리들이었다. 말소리는 없었다. 발소리만 있었다.
진우는 잠깐 숨을 멈추었다.
그것이 이 학교가 다른 곳들과 다른 첫 번째 방식이었다. 쉬는 시간인데도 아이들은 말하지 않았다. 발소리만으로 움직였다. 그 침묵은 비어 있는 침묵이 아니었다. 무언가로 가득 찬 침묵이었다. 진우는 그것을 들으려고 조금 더 가만히 있었다.
복도의 발소리들은 계단 쪽으로 멀어졌다. 사라지기 전 마지막 순간, 그 소리들은 작고 빠르고 가벼웠다.
아이들의 발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