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상자가 문 앞에 놓인 것은 오전 열한 시였다.
차민혁은 그것을 바로 열지 않았다. 고시원 복도에 쭈그려 앉아 발신인 주소를 먼저 읽었다. 충청남도 서산시. 손으로 쓴 글씨였다. 주소 아래 이름 칸에는 '장옥분'이라고 적혀 있었다. 모르는 이름이었다. 알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상자를 들어 올리는 순간 손끝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흙냄새였다. 바깥에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젖은 땅 특유의 냉기가 골판지 사이로 배어 나왔다.
그는 상자를 방 안으로 들고 들어갔다.
마포구 공덕동. 월 삼십만 원짜리 고시원. 폭이 좁아서 양팔을 벌리면 양쪽 벽에 손이 닿았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에어컨 실외기 소음, 옆방에서 새어 나오는 라면 냄새. 제대한 지 석 달이었다. 처음 두 달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자고, 먹고, 때로 편의점에 가서 맥주를 샀다. 군대에 있을 때는 늘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지금은 없었다. 그것이 예상보다 훨씬 물리적인 감각이었다. 발바닥이 허공을 디디는 것 같은, 지속적인 균형 상실.
민혁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상자를 무릎에 올렸다. 커터 칼로 테이프를 그었다. 골판지 안에는 뽁뽁이가 여러 겹 감겨 있었고, 그 안에 노트 한 권이 있었다.
표지가 물에 불었다가 마른 것이었다. 표지색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바랜, 두툼한 대학 노트. 표지 중앙에 볼펜으로 눌러쓴 글자가 있었다.
십이자 혈맥비술.
민혁은 한 박자 멈췄다.
손가락이 표지 위에서 정지했다. 글자 하나하나를 따라가는 시선이, 그 속도를 잃었다. 그는 그 단어를 안다. 열 살이었을 때부터 알았다. 새벽 두 시에 아버지가 부엌에 앉아 혼자 소주를 마시다가 그를 무릎에 앉히고 속삭이듯 말하던 것. 땅에는 맥이 있다, 민혁아. 죽은 사람이 눈을 감아도 기운은 안 꺼져. 그게 땅속으로 스며들어서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거든. 그 흐름을 읽을 줄 알면, 묘 자리를 찾을 수 있어.
아이였던 민혁은 들었다. 그리고 잊으려 했다. 그런 말을 학교에서 했다가는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을 일찍 알았다. 아버지가 돈이 없는 이유가 그런 말을 믿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에 지원한 것은, 어느 정도는 그 목소리로부터 멀어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그가 군에 있는 동안 죽었다. 강원도 어딘가에서 일하다가 산에서 굴러떨어졌다고 했다. 공식적으로는 사고였다. 민혁은 이틀 짜리 외박 허가를 받아 장례를 치렀다. 관이 땅속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느끼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이 더 이상했다.
노트를 펼쳤다.
첫 페이지. 아버지의 필체. 손 글씨는 크고 느렸다. 힘을 주어 눌러쓰는 버릇이 있어서 펜이 지나간 자국이 다음 장에도 음각으로 찍혀 있었다.
땅의 숨결을 읽는 법에 대하여.
서론 없이 시작하는 문장이었다. 제목도, 날짜도 없었다. 그냥 그 문장이 첫 줄에 있었다.
민혁은 읽기 시작했다.
처음 열 페이지는 이론이었다. 한자가 섞인 문어체로 쓰인, 풍수지리의 기본 원리. 산줄기의 방향, 물의 흐름, 음택과 양택의 차이. 그가 이미 아는 것들이었다. 아버지의 목소리로, 어린 시절 들어온 것들. 그런데 그것이 활자로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무언가가 달랐다. 구술이 가지는 부유함, 그 맥락 없는 유동성이 없었다. 모든 것이 번호가 매겨지고, 좌표가 붙어 있었다. 방위각, 경사도, 토질의 습도 차이. 한 문단에 세 가지 측정값이 들어가는 문장도 있었다.
이건 기록이었다. 체계적인 기록.
민혁은 자신도 모르게 등을 폈다.
열두 번째 페이지에 손으로 그린 도해가 있었다. 경사면의 단면도. 등고선처럼 층위를 나타내는 선들 사이에 표시 기호들이 촘촘히 찍혀 있었다. 각 기호마다 주석이 달려 있었다. ▲ : 지열 상승점. ● : 혈맥 집중부. ○ : 지기 산포 구간.
민혁은 그 도해를 오래 보았다.
그는 군에서 지형 판독을 배웠다. 등고선과 음영을 읽고 사거리를 계산하고 이동 경로를 설계하는 것. 그것과 이 도해는 문법이 달랐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공간을 숫자로 번역하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기호로 고정하는 것.
그는 페이지를 넘겼다.
스무 번째 페이지. 아버지의 필체가 갑자기 달라졌다. 더 빨라지고, 더 눌러 쓴 흔적이 깊어졌다. 피로할 때 쓴 것인지, 흥분했을 때 쓴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어린 시절 내가 이것을 배울 때,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죽은 자는 열을 남긴다. 불의 열이 아니라 존재의 열이다. 사람이 한 자리에 오래 있으면 그 자리가 달라지듯, 죽은 자가 땅속에 오래 있으면 땅이 달라진다. 우리는 그 달라짐을 손바닥으로 읽는다. 장갑을 끼면 느끼지 못한다. 편견을 가지고 있어도 느끼지 못한다. 이 기술은 열린 손과 비어 있는 머리를 요구한다.
열린 손과 비어 있는 머리.
민혁의 손이 노트 위에 멈췄다.
그 문장이 아버지의 목소리로 들렸다. 정확하게, 아버지의 목소리로. 강원도 사투리가 섞인, 낮고 약간 쉰 목소리. 그가 초등학교 사학년이었을 때였다. 늦가을 오후, 마을 뒤 야산. 아버지가 그를 데리고 올라가서 낙엽이 쌓인 사면에 손을 짚게 했다. 장갑 벗어. 그래야 느껴지니까. 맨손을 낙엽 아래 흙에 눌렀다. 차가웠다. 차갑기만 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바로 옆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여기야. 여기 더 따뜻하지? 민혁은 솔직히 말했다. 모르겠어요. 그러자 아버지가 웃었다. 지금은 몰라도 돼. 기억만 해.
그 기억이 지금 이 방에서 물리적으로 돌아왔다. 손바닥이 차가웠다. 고시원 바닥이 차갑기 때문이 아니었다. 손바닥 자체가, 그날 낙엽 아래 흙의 온도를 기억하고 있었다.
민혁은 손을 쥐었다가 폈다. 한 번.
노트를 계속 읽었다.
상자 안에 편지가 있었다는 것을 그는 한참 후에야 발견했다. 노트를 싸고 있던 뽁뽁이 아래에 접혀 있었다. 편지지 한 장. 볼펜 글씨.
안녕하세요. 차봉수 씨 집에 오래 세를 놓았던 장옥분이라고 합니다. 차봉수 씨가 돌아가신 후에 방을 정리하다가 이걸 찾았어요. 책상 서랍 이중 바닥에 있었습니다. 한동안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가지고 있다가, 아드님 주소를 수소문해서 보내게 됐습니다. 뭔가 중요한 거 같아서요. 손 글씨로 빽빽하게 쓴 노트라 내용은 못 읽겠더라고요. 아무튼 잘 받으셨으면 합니다.
민혁은 편지를 두 번 읽었다. 세 번은 읽지 않았다.
이중 바닥.
아버지는 이 노트를 숨겼다.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으려 했거나, 잃어버리지 않으려 했거나. 두 가지 중 하나였고, 그 두 가지는 같은 것이 아니었다. 민혁은 잠시 그 차이를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을 멈췄다. 지금 당장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창문 너머에서 빗소리가 시작됐다.
공덕동은 비가 오면 골목이 빨리 찼다. 노면이 낮았다. 민혁은 창문 쪽은 보지 않고 노트를 무릎에 올린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오십 페이지. 백 페이지. 노트는 두꺼웠다. 마지막까지 글자가 차 있었다. 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쌓은 것이었다.
그는 다시 처음 장을 펼쳤다.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더 천천히.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으면서.
땅의 숨결을 읽는 법에 대하여.
방 안에 흙냄새가 돌았다. 젖은 흙. 차갑고 무거운, 뭔가를 오랫동안 품어왔던 것들이 가진 냄새. 창문은 닫혀 있었다. 바깥에서 들어올 수 없는 냄새였다. 노트에서 나는 냄새였다. 아버지가 수십 년 동안 손에 묻히고 다닌 흙의 냄새가 종이 속으로 스며든 것이었다.
민혁은 그 냄새를 맡으면서 읽었다.
슬프지 않았다. 슬픔이 와야 할 자리가 있었지만, 거기에 슬픔이 없었다. 그 대신 있는 것은 다른 감각이었다. 오랫동안 어두운 방에 있다가 불이 켜질 때 눈이 받아들이는, 그 첫 번째 자극. 선명함. 위치 확인.
제대 후 석 달 동안 없었던 것.
그는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지금 이 방에. 이 노트를 읽고 있는. 이것을 다음에 어떻게 써야 할지 아직은 모르지만, 이것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창밖에서 빗소리가 굵어졌다. 민혁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노트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