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멈췄을 때, 진우는 자신이 제대로 내린 건지 확신하지 못했다.
정류장 표지판에는 분명 '새빛복지관 앞'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사방을 둘러봐도 버스 정류장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11월의 바람이 낙엽 몇 장을 굴려갔고, 길 건너편 구멍가게 처마 밑에 매달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들렸다. IMF. 구조조정. 실업률. 한 해 내내 들어온 단어들이었다. 이젠 그 단어들이 공기처럼 느껴졌다. 들이마시고, 내쉬고, 그래도 살아있는 것처럼.
진우는 서류 봉투를 가슴에 더 꽉 끌어안고 골목 안쪽으로 걸었다.
건물은 모퉁이를 돌자마자 나타났다. 안내 책자에 실린 사진에서는 제법 환해 보였는데, 아마도 사진작가가 여름날 정오를 골라 찍었거나, 아니면 그냥 렌즈를 잘못 닦았거나. 지금 눈앞의 새빛복지관은 3층짜리 회색 건물이었다. 외벽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고, 1층 창문 두 개에는 노란 테이프가 X자로 붙어 있었다. 유리가 금이 갔거나, 아니면 금이 가려는 참이거나.
현관 앞 작은 화단에는 국화가 몇 포기 남아 있었다. 누군가 심은 게 분명했다. 뽑히지 않으려는 것처럼 뿌리를 내리고, 늦가을 추위에도 아직 시들지 않은 채로.
진우는 잠시 그 앞에 서 있다가 문을 밀었다.
냄새가 먼저였다.
밥 냄새. 정확히는 식어가는 밥 냄새, 거기에 소독약 냄새와 낡은 나무 바닥의 냄새가 섞인. 진우는 어릴 때 친척집에서도 비슷한 냄새를 맡은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가, 곧 그 생각을 거뒀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복도는 좁고 길었다. 한쪽 벽에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들이 줄지어 붙어 있었다. 크레파스로 그린 가족, 태양, 집. 크레파스 집들은 죄다 하늘색 지붕을 달고 있었다. 진우는 걸어가면서 그림들을 훑어봤다. 이상하게도 사람 얼굴을 제대로 그린 그림이 없었다. 몸통과 팔다리는 있는데 얼굴이 동그라미 하나로만 표현되어 있거나, 아예 생략되어 있었다.
천장에서 형광등 하나가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일정한 간격도 아니었다. 그냥, 기억이 날 때마다, 깜빡.
안내 데스크랄 것도 없는 자리에 젊은 직원 하나가 서류를 안고 지나가다 진우를 보고 멈췄다.
"혹시 새로 오신 분이세요?"
"네. 양진우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근무하기로——"
"아, 잠깐만요."
그는 진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쪽으로 사라졌다. 진우는 서 있었다. 형광등이 또 깜빡였다.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웃음소리와, 그보다 약간 더 높은 음역대의 다른 소리가. 진우는 소리를 따라 복도 끝까지 걸었다. 오른쪽으로 꺾인 곳에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그 안에 아이들이 있었다.
일곱, 여덟 명쯤 됐다. 나이는 제각각이었다. 작은 탁자 두 개를 붙여놓은 자리에서 몇 명이 퍼즐을 맞추고 있었고, 구석에 앉은 아이 하나는 벽을 바라보며 혼자 뭔가를 중얼거렸다. 휠체어에 앉은 여자아이가 진우를 먼저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우가 손을 살짝 들어 인사하자, 여자아이는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가, 그러다 옆 아이 소매를 잡아당겼다.
진우는 문틀에 기댄 채 방 안을 들여다봤다.
퍼즐을 맞추던 아이 중 하나, 까만 머리에 귀 뒤로 살짝 보청기를 꽂은 아이가 진우를 봤다. 열두 살쯤 됐을까. 얼굴은 차분했다. 차분하다는 말이 어울리기에는 너무 어린 얼굴이었지만,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아이는 진우를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손으로 짧게 표현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동작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퍼즐로 시선을 내렸다.
"저기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진우가 돌아봤다.
여자가 서 있었다. 삼십대 초반쯤. 감색 카디건에 흰 셔츠, 머리는 뒤로 묶고 있었다. 손에는 두꺼운 바인더를 들고 있었는데, 그 바인더를 진우에게 내밀었다.
"업무일지예요. 오늘부터 매일 작성하셔야 해요. 양식은 앞 페이지에 있고요."
그게 다였다.
진우가 바인더를 받으면서 "감사합니다, 저는 양진우——" 하고 말을 시작했을 때, 여자는 이미 방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방 구석, 아까 진우가 반쯤 열린 문 너머로 보지 못했던 쪽. 거기에 아이 하나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울고 있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데 입은 굳게 다물린 채였다. 여자는 그 아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아이 얼굴 높이로 시선을 맞췄다. 뭔가 말하는 것 같았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진우는 문 앞에서 바인더를 가슴에 안고 잠시 그 장면을 바라봤다. 그러다 자신이 보지 말았어야 할 걸 본 사람처럼, 조용히 복도로 물러섰다.
그날 저녁, 진우는 복지관 근처 고시원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4만원짜리 방이었다. 창문이 없었고, 벽지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으며, 옆방에서는 라디오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나운서가 환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달러. 원화. 무너지는 것들의 숫자들.
진우는 배낭에서 공책을 꺼냈다. 사회복지학과를 다닐 때부터 써온 공책이었다. 현장 기록용이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사실은 그냥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용도.
그는 날짜를 적고, 잠시 볼펜을 쥔 채 멈췄다가, 썼다.
새빛복지관. 건물은 생각보다 작다. 아이들은 있다. 복도에 그림이 붙어 있는데, 얼굴이 없는 그림들이다. 형광등이 깜빡인다. 밥 냄새가 난다.
그는 거기서 또 멈췄다.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게 아니었다. 아까 문 앞에서 본 장면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여자가 아이 앞에 무릎을 꿇던 방식, 아이의 뺨을 타고 내리던 말없는 눈물. 그 방 안의 공기가 나머지 복도와 달랐다는 것. 마치 다른 온도였다는 것.
그는 다시 썼다.
이 복지관은 오랫동안 숨을 참아온 곳 같다.
그러고는 공책을 덮었다.
나중에, 훨씬 나중에, 그는 이 첫 페이지를 읽고 부끄러워할 것이었다. 너무 문학적이었다고, 너무 관찰자의 시선이었다고. 숨을 참는 건 건물이 아니라 그 안의 사람들이었다는 걸, 그는 아직 몰랐다.
그날 밤 옆방 라디오는 새벽 두 시까지 꺼지지 않았다. 진우는 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봤다. 바인더 업무일지에는 아직 이름 석 자도 쓰지 못했고, 그 여자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첫날이었다.
창문 없는 방이었지만, 어딘가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벽 틈 사이였을 것이다. 가느다란, 그러나 끊이지 않는 바람 소리.
진우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