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이 산을 갈랐다.
메아리가 채 죽기도 전에 두 번째 총성이 터졌고, 세 번째는 더 가까웠다. 설원이 울렸다. 청산리 골짜기의 자작나무들이 총탄에 찢겨 흰 살을 드러냈고, 잘린 가지들이 눈 위에 떨어져 붉은 점을 찍었다. 10월의 바람은 살을 도려내는 칼이었다.
김좌진은 바위 뒤에 등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왼쪽 어깨에서 피가 흘렀다. 솜을 덧댄 군복이 젖어들어 벌써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탄창을 더듬었다. 손끝에 남은 감각으로 세었다. 한 발. 마지막 한 발이 남아 있었다.
아래쪽 사면에서 일본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명령조의 짧고 딱딱한 외침들이 눈 쌓인 비탈을 타고 올라왔다. 그들은 좁혀오고 있었다. 발소리가 셋, 아니 다섯. 능선을 우회하는 부대가 있었다. 그 방향을 알 수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지형을 떠올렸다.
등 뒤의 바위에서 서쪽으로 열 걸음, 낭떠러지. 북쪽으로 이십 걸음, 고개 마루. 동쪽은 이미 막혔다. 남쪽이 문제였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소리가 두 곳에서 났다. 분대 둘이 서로 각도를 잡아 협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체계적이었다. 처음부터 이 바위를 목표로 좁혀온 것이었다.
그의 손아귀에 쥔 소총이 가벼웠다. 너무 가벼웠다.
얼마나 많은 전투를 치렀는가. 봉오동의 안개 속에서 아군을 이끌어 그 배의 병력을 무너뜨렸다. 청산리의 열흘간, 여섯 차례의 교전에서 이천 넘는 적을 쓰러뜨렸다. 백 명이 채 안 되는 독립군이 완전무장한 정규군을 산 속으로 유인해 조각내고, 또 조각냈다. 지형이 무기였다. 바람 방향이 무기였다. 적의 긍지와 조급함이 무기였다.
그러나 탄약은 무기가 아니었다. 탄약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다 타버렸다.
발소리가 바위 코앞까지 왔다.
김좌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하늘이 보였다. 10월의 백두산 기슭 하늘은 혹독하게 맑아서, 그 푸름이 차라리 잔인했다. 그는 그 푸름을 오래 바라보았다. 가슴속 어딘가에서 이름들이 일어났다. 오늘 새벽 능선 아래로 보낸 열네 명의 이름들. 봉오동에서 묻지 못하고 온 다섯의 이름들. 경성 거리에서 끌려간 형제들의 이름들. 이름을 가진 사람들, 이름을 빼앗긴 사람들, 이름조차 모르는 채 죽어간 사람들.
그는 탄창에 마지막 총알을 재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바위 왼편에서 군화 소리가 들렸다. 오른편에서도 들렸다. 쐐기 형태였다. 잘 훈련된 포위였다.
그는 생각했다. 이 한 발로는 포위를 뚫지 못한다. 그러나 앉아서 잡힐 수는 없었다. 마지막 총구는 저들에게 향해야 했다. 백두산 호랑이는 우리 안에서 죽지 않는다.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눈이 하얗게 타올랐다.
눈이 아니었다. 설원이 흰 것이 아니었다. 세계 자체가 타고 있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지워졌다. 총성도, 발소리도, 바람 소리도 멈추었다. 오직 그 빛만이 존재했다. 귀가 먹었다. 눈이 멀었다. 감각이 하나씩 꺼지는데, 이상하게도 고통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발 아래의 눈이 사라지는 감각이었다.
그리고 땅이 바뀌었다.
뜨거웠다.
김좌진은 황토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손바닥이 마른 흙을 움켜쥐었다. 흙이었다. 눈이 아니었다. 돌 틈새에서 무언가 마른 풀이 부스러졌다. 코에 낯선 냄새가 들어찼다. 연기였다. 그러나 청산리의 화약 연기가 아니었다. 목재가 타는 냄새. 짚이 타는 냄새. 사람 사는 곳이 타는 냄새였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설원이 없었다.
자작나무가 없었다.
광막한 황갈색 들판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하늘은 낯선 계절의 색이었다. 가을이긴 했으나, 조선의 가을이 아니었다. 공기가 달랐다. 태양의 각도가 달랐다. 바람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남쪽에서 불어왔고, 그 바람 속에 매캐한 연기 냄새가 짙게 섞여 있었다.
멀리서 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였다. 여럿이었다. 어른의 울음과 아이의 울음이 뒤섞인,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소리였다. 그 방향에서 가느다란 연기 기둥이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김좌진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소총이 있었다. 아직 손에 쥐어져 있었다. 마지막 총알이 장전된 채로. 그것만이 조선에서 가지고 온 전부였다. 왼쪽 어깨의 상처는 여전히 쓰렸다. 군복은 청산리의 것이었다. 발에는 같은 군화가 신겨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듯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일어섰다.
어지러웠다. 어깨의 핏기가 가슴 쪽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숨을 고르고 한 걸음 걸었다. 다리가 버텼다. 두 걸음 걸었다. 그도 버텼다. 지형을 읽는 눈이 먼저 작동했다. 훈련된 본능이었다. 해의 방향, 바람의 방향, 지세의 높낮이를 보는 것이 그에게는 숨 쉬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동쪽에 구릉이 있었다. 남쪽에서 연기가 올랐다. 서쪽 지평선은 평탄했다. 북쪽으로는 완만한 능선이 이어졌다. 그는 남쪽 연기를 보았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연기는 사람을 의미했다. 사람은 정보를 의미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상태로 낯선 인간들과 대면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공황을 허락하지 않았다. 독립군 장교로 살아온 세월이 가르친 것 중 하나가 그것이었다.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알 수 있는 것을 먼저 세어라. 알 수 없는 것은 그 다음에 알아가면 된다.
알 수 있는 것. 생존해 있다. 무기가 있다. 상처는 깊지 않다. 시각은 멀쩡하고 청각도 살아 있다. 기온은 포근하다. 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직 모른다.
알 수 없는 것. 여기가 어디인가. 언제인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가.
그는 마지막 질문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내려놓았다. 그것은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다. 지금은 살아야 했다.
구릉 아래를 향해 걸어가면서 그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낯선 수종의 나무들이 구릉 사면에 드문드문 서 있었다. 넓고 우람한 잎을 가진 것들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조선의 산에서 듣던 것과 달랐다. 발아래 흙의 질감이 달랐다. 냄새가, 하늘이, 빛의 질감이 달랐다.
연기 냄새가 더 진해졌다.
그리고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울음이 아니었다. 비명이었다. 칼 부딪히는 소리였다. 불꽃이 탁탁 터지는 소리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발을 멈추고 몸을 낮추었다. 총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구릉 마루를 넘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불타고 있었다.
마을이었다. 나지막한 황토 담장과 초가지붕으로 이루어진 마을이, 세 군데에서 불길을 뿜으며 타고 있었다. 담장 밖으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뛰고 있었다. 검은 천으로 머리를 두른 무리들이 그 사람들을 쫓고 있었다. 손에 든 것은 낫이었고, 창이었고, 날이 넓은 도검이었다. 복장이 이질적이었다. 갑옷이 있었다. 쇠를 덧댄, 오래된 방식의 갑옷.
그는 잠시 그 광경을 보았다.
조선이 아니었다. 확실했다. 복장도 무기도 건물도 조선의 것이 아니었다. 마을의 형태도, 사람들이 입은 옷도 그가 아는 어느 것과도 달랐다. 그러나 달라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검은 천으로 머리를 동여맨 자들이 비무장한 사람들을 쫓는 그 그림은, 그가 일생을 두고 싸워온 그림과 다르지 않았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밟고 있었다.
그는 소총을 내려다보았다. 총알 한 발. 이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저 아래 불길 속에서 사람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계산이 빨랐다.
총은 쓰지 않는다. 총성은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킨다. 총 한 발로 죽일 수 있는 것은 한 명이지만, 그 소리로 불러오는 것은 전부다. 지금은 아니다.
그는 마을 주위의 지형을 훑었다. 서쪽에 낮은 둑이 있었고, 그 너머로 마른 개울바닥이 보였다. 북쪽에 옥수수 밭이 있었다. 불에서 멀었다. 마을에서 달아나는 사람들이 그쪽을 향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겁에 질려 열린 들판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쫓기 좋은 방향이었다.
그는 구릉 아래로 내려갔다. 빠르게, 그러나 소리 없이. 조선의 산악 지형을 열 해 넘게 누빈 발이었다. 땅을 읽는 감각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는 마을 외곽의 담장 그늘을 따라 움직였다. 쓰러진 담장 하나를 넘었다. 가까이서 본 불은 더 뜨거웠고, 타는 냄새는 더 역했다.
달아나던 여인 하나가 그의 앞에서 넘어졌다.
여인은 등에 아이를 업고 있었다. 넘어지면서 아이를 안으려 했고, 그 바람에 앞이 막혔다. 뒤에서 창을 든 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열 걸음. 다섯 걸음.
김좌진이 움직였다.
소총 개머리판으로 창을 든 자의 손목을 쳤다. 창이 바닥에 떨어졌다. 발이 나가며 무릎 뒤를 쓸었다. 상대가 무너졌다. 팔꿈치가 목덜미를 눌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여인이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공포에 질린 눈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낯섦을 인식하는 눈이었다. 눈앞에 선 이 사람이 그 어떤 세계에도 속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인식이었다.
그는 두 손을 들어 빈 손바닥을 보였다. 총은 어깨에 걸었다. 그리고 개울 방향을 가리켰다. 저리로 가라는 의미였다.
여인은 알아들었다. 아이를 세게 껴안으며 일어나 달렸다.
그는 몸을 돌렸다. 북쪽 옥수수 밭이 눈에 들어왔다. 달아나는 사람들을 그리로 몰아야 했다. 열린 들판에서는 말을 가진 자들에게 따라잡힌다. 그러나 밭 너머의 개울바닥, 그리고 구릉의 수풀 안으로 사람들을 분산시킬 수 있다면 추격은 무의미해진다. 상대는 조직이 없었다. 무리 지어 약탈하는 자들이었다. 지휘 체계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약점이었다.
그는 옥수수 밭 끝으로 달려가 큰 소리를 질렀다.
소리는 말이 아니었다. 언어가 아니었다. 방향이었다. 고함이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었다. 독립군 야전에서 만든 소리였다. 그 소리에 달아나던 몇 사람이 본능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팔을 들어 밭 너머를 가리켰다. 손짓은 어느 시대에도 같은 의미를 가졌다.
이쪽으로.
검은 두건을 두른 자들 중 셋이 그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좋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밭 안으로 뛰어들었다. 옥수수대 사이로 몸을 낮추었다. 말들이 밭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빽빽한 줄기가 말의 다리를 방해했다. 그는 그 틈새를 이용해 반대 방향으로 빠져나왔다.
전투는 짧게 끝났다. 검은 두건을 두른 자들은 수가 적지 않았으나, 목적이 없었다. 약탈이 목적인 자들은 저항이 예상치 않은 방향에서 나타나면 흩어진다. 김좌진은 밭과 담장과 개울둑을 이용해 그들의 시선을 끌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총 한 발도 쓰지 않았다.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 검은 두건의 무리는 마을에서 물러났다. 불은 아직 두 군데서 타고 있었다.
그는 타오르는 담장 앞에 서서 숨을 가라앉혔다.
손이 떨렸다. 이제야 떨렸다. 어깨의 통증이 격렬하게 되살아났다. 밭을 뛰던 무릎이 무거웠다. 그는 담장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주저앉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을 감자 청산리 골짜기가 보였다. 흰 설원, 자작나무, 마지막으로 재었던 총. 그 총이 지금 어깨에 걸려 있었다. 그는 손으로 총몸을 잡았다. 차가운 쇠의 감촉이 선명했다.
그것만이 증거였다. 내가 거기에 있었다는 증거. 내가 조선의 사람이라는 증거.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가.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이방인을 향해 의심스러운 눈길을 던졌다. 말소리가 들렸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말소리 안에서 두려움이 걷히는 소리, 낯선 것을 가늠하는 소리가 들렸다. 인간의 목소리가 담는 것들은 어떤 언어를 쓰든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노인이 가장 먼저 다가왔다. 허리가 굽고 수염이 희었다. 노인은 두 손을 모아 이마 높이까지 올렸다. 예를 표하는 동작이었다. 그리고 무언가 말했다. 김좌진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노인은 다시 말했다. 좀 더 천천히, 좀 더 크게.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억양의 형태가 익숙했다. 한자로 이루어진 말의 흐름처럼 느껴졌다. 완전히 낯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서를 읽었다. 고전을 알았다. 그러나 입으로 내뱉는 이 소리와 그가 읽은 문자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그는 땅에 손가락을 댔다. 그리고 흙 위에 글자를 썼다.
여기가 어디인가(此地何處).
노인의 눈이 커졌다. 노인은 쭈그려 앉아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흙 위에 손가락으로 답을 썼다.
기주(冀州).
기주. 한나라의 기주. 김좌진은 그 두 글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심장이 천천히 뛰었다.
그는 다시 땅에 썼다.
지금이 언제인가(今是何時).
노인이 썼다.
중평 원년(中平元年).
중평 원년. 후한의 연호였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해.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역사책에서 읽은 것이었다. 그 역사책 속의 해가 지금이었다.
한참 동안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흰 빛. 그것이 이곳으로 데려왔다. 어떻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왜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곳이 조선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고, 이 시대가 자신이 살아온 시대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했다.
그는 하늘을 보았다. 기울어가는 해가 황토 들판 위에 길고 붉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연기가 여전히 올랐다. 타다 남은 나무 향이 코를 찔렀다.
그는 일어섰다. 어지러움이 잠시 그를 흔들었다. 그러나 쓰러지지 않았다.
생각했다. 냉정하게 생각했다.
이 시대는 전쟁의 시대였다. 권력을 다투는 자들이 백성들을 밟고 지나가는 시대였다. 자신은 무기가 있었다. 그러나 총알은 한 발뿐이었다. 이름이 없었다. 언어가 없었다. 부하가 없었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두려움이 판단을 흐리게 두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마을 외곽으로 걸어 나갔다. 구릉 기슭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조선의 소나무와 모양새가 달랐으나, 같은 과의 나무였다. 소나무를 보면 무언가 안도가 되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그랬다.
그는 소나무 뿌리 옆에 무릎을 꿇었다. 흙을 파기 시작했다. 맨손으로, 돌을 이용해 파들어갔다. 어깨가 쑤셨다. 아랑곳하지 않았다. 충분히 깊이 파자, 그는 소총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바라보았다.
청산리의 골짜기에서, 10월의 설원에서, 마지막으로 쥐었던 총이었다. 수많은 전투를 함께한 물건이었다. 조선의 것이었다. 자신이 조선의 사람이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이 시대에서 이것은 무기가 아니었다. 총알 한 발이 남은 빈 총은, 사용한 순간 그 이후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의 존재를 누군가에게 보인다면,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짐이었다.
그는 총을 구덩이 안에 내려놓았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리고 흙을 덮었다. 한 줌씩 덮었다. 마지막 흙을 올릴 때 그의 손이 잠깐 멈추었다. 멈추었을 뿐이었다. 떨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흙을 덮었다. 소나무 뿌리 옆에 작은 봉분처럼 다졌다.
그리고 일어나 소나무 껍질을 바라보았다.
허리춤에 작은 칼이 있었다. 마을 전투에서 떨어진 것을 집어 든 칼이었다. 그는 그 칼로 나무껍질을 벗겨냈다. 드러난 속살이 희었다. 그 위에 칼 끝으로 글자를 새겼다.
金鵲振.
금작진. 금까치가 날갯짓을 친다. 작, 鵲은 까치였다. 그의 자(字)에서 온 것이었다. 청산리의 김좌진이 이 시대에서 쓸 이름이었다.
세 글자를 새기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획을 긋고 나서 그는 잠시 그 이름을 보았다. 새 나무 속의 흰 살에 깊게 새겨진 세 글자가 오후의 빛을 받아 선명했다.
조선의 이름이 땅 속에 있었다. 새 이름이 나무 위에 있었다.
그는 나무에서 몸을 돌렸다. 마을 쪽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남은 사람들이 타다 남은 집들 사이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연기는 아직 오르고 있었으나, 불꽃은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는 그쪽으로 걸었다.
첫걸음을 내디뎠다. 금작진(金鵲振)의 첫걸음이었다.
갈 길은 멀었다. 어떤 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발이 서야 할 곳이 어디인지는 알았다. 백성들이 짓밟히는 곳.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소모품으로 쓰는 곳. 거기에 서야 했다. 그것은 시대가 달라져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황혼의 기주 들판 위로 연기가 올랐다. 타다 남은 마을에서, 짓밟힌 땅에서, 패권의 시대가 태연하게 피워올리는 연기가 하늘로 번졌다. 그 연기 속으로 한 사람의 그림자가 걸어 들어갔다.
이름도 없는 나라에서 온 장군이, 이름을 새로 얻어, 이름 없는 사람들의 세계로 발을 들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