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는 한 장짜리였다.
회사 이름은 '실크로드 문화유산 연구소'. 리팔은 그 이름을 세 번 읽었다. 처음엔 빠르게, 다음엔 느리게, 마지막엔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여서. 종이를 뒤집으면 계좌번호 하나와 날짜 하나. 그게 전부였다. 협상의 여지가 있는 척하는 계약서였지만 사실 그런 척도 하지 않았다.
리팔은 계약서를 접어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창밖으로 얼링핫의 오후가 흘렀다. 중국과 몽골의 경계가 모래처럼 흐릿해지는 동네였다. 간판 절반은 중국어, 나머지 절반은 키릴 문자, 가끔 그 사이에 의미를 잃어버린 영어 단어들. 거리에는 먼지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바람이 불면 걷어지는 게 아니라 다른 곳으로 옮겨갈 뿐인 종류의 먼지였다.
식당 이름은 없었다. 문에 붙어 있던 한자 두 글자는 오래전에 떨어져 나갔고 흔적만 남아 있었다. 테이블은 여덟 개. 점심이 끝난 시간이라 리팔 혼자였다.
주인 여자가 묻지도 않고 차를 가져왔다. 리팔은 마시지 않았다.
뚱보 최가 들어온 건 오후 두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덩치가 먼저 들어왔다. 문이 좁다는 걸 몸으로 기억하는 사람처럼 옆으로 조금 틀어서 통과했다. 방수 재킷 포켓에서 뭔가 불룩하게 솟아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말린 생선이었다. 그는 리팔을 보자마자 테이블을 골랐다. 리팔 맞은편. 창문에서 두 번째로 가까운 자리.
"밥 시켰어?" 뚱보 최가 앉으며 물었다.
"아직."
"시켜."
그게 인사였다.
주인 여자가 다시 나왔다. 뚱보 최가 메뉴판을 보지 않고 양고기볶음과 만두를 시켰다. 리팔은 면 한 그릇. 둘 다 다 먹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 시키는 종류의 주문이었다.
뚱보 최는 재킷에서 말린 생선 한 조각을 꺼내 입에 물었다. 씹는 소리가 났다. 리팔은 창밖을 봤다.
"네 번째야." 뚱보 최가 말했다.
"알아."
"이번엔 황 씨 직접 건이라는 거, 너도 알지?"
"알아."
뚱보 최가 생선을 씹으며 리팔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봤다. 리팔은 창밖을 보는 눈을 바꾸지 않았다.
"같이하자고 연락 온 거 받아들이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볼게."
"물어봐."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일 내용."
리팔이 뚱보 최를 봤다. 정면으로.
"왜?"
"표정이 없잖아. 계약서 받고 온 사람 표정이 아니야."
음식이 나왔다. 주인 여자가 두 그릇을 내려놓고 돌아갔다. 뚱보 최는 젓가락을 들었다가 내려놓고 만두 하나를 손으로 집었다.
리팔은 면을 한 번 젓고 먹지 않았다.
"먹어." 뚱보 최가 말했다.
"나중에."
"나중에 먹으면 불어."
리팔은 젓가락을 내려놨다. 테이블 아래로 손을 옮겼다. 재킷 안주머니. 계약서 바로 옆에 다른 것이 있었다. 가죽 표지의 수첩. 낡아서 모서리가 닳았고 등가죽이 두 번 갈라졌다가 검은 실로 꿰매져 있었다. 엄지손가락이 표지를 쓸었다. 한 번.
"고고학자가 온다던데." 뚱보 최가 만두를 씹으며 말했다.
"알아."
"미국에서 온다고."
"알아."
"UCLA. 논문 주제가 혈양 관련이래. 이거 황 씨가 붙인 거잖아. 우리 감시용이겠지."
리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뚱보 최가 두 번째 만두를 집었다. "근데 감시용치고는 이력이 좀 진짜야. 중앙아시아 유목 문명 전공. 논문을 몽골어랑 한국어랑 영어로 다 썼어. 현장 경험도 있고. 괴상한 여자야."
"같이 내려가면 되는 거야?"
"그렇게 됐어."
뚱보 최가 리팔의 면 그릇을 턱으로 가리켰다. "먹어. 오늘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야 해."
문이 열렸다.
여자였다. 삼십대 초중반. 배낭이 크고 무거워 보였는데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왼손에 뭔가를 쥐고 있었다. 작은 녹음기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측면에 금이 가 있었다. 테이프로 붙여놓은 흔적. 그래도 버리지 않은 물건이었다.
서윤이 식당 안을 한 번 훑었다. 리팔과 뚱보 최를 발견하는 데 일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테이블로 왔다. 배낭을 의자에 기대 세우고 앉았다. 녹음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리팔은 녹음기의 금 간 부분을 봤다. 최근에 생긴 균열이 아니었다.
"서윤입니다." 한국어였다. 미국 억양이 없었다. "계약서 받으셨죠?"
"받았어요." 뚱보 최가 대답했다.
서윤은 뚱보 최를 보고 리팔을 봤다. 리팔은 면 그릇을 보고 있었다.
"혈양에 대해서 사전에 어느 정도 알고 계세요?"
"충분히." 뚱보 최가 말했다.
"어느 정도가 충분히예요?"
"들어가서 나올 수 있을 만큼요."
서윤이 잠깐 침묵했다. 그러더니 배낭 옆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지도였다. 위성 이미지 위에 손으로 직접 선을 그은 것들. 그녀가 테이블 위에 펼쳤다.
"현재까지 제가 파악한 입구 후보 지점이에요. 세 곳인데."
뚱보 최가 지도 위로 몸을 기울였다.
리팔은 지도를 보지 않았다. 테이블 아래에서 가죽 수첩을 꺼냈다. 소리가 나지 않게. 표지를 넘겼다. 안쪽 첫 페이지, 둘째 페이지, 세 번째. 여기. 아버지의 글씨였다. 깨알 같고 각이 지고 오른쪽으로 약간 기운. 숫자들 사이에 몽골어 단어 두 개. 그 아래에 북위와 동경. 소수점 다섯 자리.
서윤이 지도 위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제가 가장 가능성 높게 보는 건 이쪽이에요. 지형 데이터랑 인접 유적 분포를 봤을 때."
그녀의 손가락이 짚은 좌표.
리팔은 수첩의 숫자를 내려다봤다. 천천히. 그리고 올려다보지 않았다.
일치했다.
소수점 다섯 자리까지.
리팔은 수첩을 덮었다. 테이블 아래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재킷 안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어때요?" 서윤이 물었다.
리팔이 처음으로 지도를 봤다. 그녀의 손가락이 짚고 있는 자리를. 이 초.
"나쁘지 않네요."
뚱보 최가 세 번째 만두를 집으며 리팔을 봤다. 리팔은 보지 않았다.
서윤이 녹음기를 들었다. 빨간 버튼을 눌렀다. 작은 소리가 났는데 녹음이 시작되는 소리인지 기계가 버티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일정은요? 언제 출발해요?"
"내일 새벽." 뚱보 최가 말했다.
"장비는."
"내가 담당." 뚱보 최가 말했다. "구조 분석, 굴착, 밀폐 공간 대응 전부."
서윤이 리팔을 봤다.
"당신은요?"
리팔은 남은 면을 젓가락으로 한 번 더 저었다. 여전히 먹지 않았다.
"안내."
서윤이 뭔가 더 물으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녀는 녹음기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지도를 접기 시작했다. 손이 빠르고 정확했다. 군더더기 없이.
밖에서 바람이 지나갔다. 식당 창문이 미세하게 떨렸다. 리팔은 그 소리를 들었다. 사막에서 오는 바람이었다. 모래를 품고 있는 종류. 손등으로 느끼면 사포 같은 느낌의.
뚱보 최가 양고기볶음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근데 그 녹음기 고장 아니에요?"
서윤이 녹음기를 봤다. 다시 빨간 버튼을 눌렀다. 소리가 났다. 아까와 같은 소리.
"작동해요."
"금 갔는데."
"작동한다고요."
뚱보 최가 리팔을 봤다. 리팔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먼지가 쌓이는 거리. 의미를 잃은 간판들.
얼링핫의 오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계속 흘렀다.
리팔은 면을 한 젓가락 집어 들었다. 식어 있었다. 먹었다. 맛이 없었다. 두 젓가락을 더 먹고 내려놨다.
주머니 안에서 수첩이 느껴졌다. 가죽의 온기. 아니면 리팔 자신의 체온이 거기 모인 것.
북위. 동경. 소수점 다섯 자리.
칠 년이었다.
리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