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 시, 가보옥은 유리 앞에 서 있었다.
정확히는, 서 있다고 부르기도 민망한 자세였다. 이마를 유리에 기댄 채 두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발바닥 절반은 카펫 위에 절반은 허공에 걸쳐, 마치 유리가 없었다면 그냥 떨어졌을 것 같은 각도로 기울어 있었다. 47층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통유리는 서울의 새벽을 액자 없는 그림처럼 붙들고 있었고, 한강은 그 아래서 흘렀다. 조용히, 일정하게, 자기 일을 하면서.
강은 언제나 자기 일을 했다.
보옥은 유리에 닿은 이마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강을 내려다봤다. 저 검은 물 위에 도시의 불빛이 무수히 부서져 있었다. 올림픽대로의 가로등, 동호대교의 아치, 강 건너 아파트 단지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몇 개의 창문. 어딘가 저 안에서 누군가는 라면을 끓이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울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내일의 면접을 위해 자기소개서를 고쳐 쓰고 있을 것이었다. 보옥은 그 창문들을 오래 바라봤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냥, 불이 켜진 것들을 보고 있으면 자신도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사실은 그런 기분도 별로 들지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등 뒤에서 소리가 났다. 부스럭거림, 한숨 같은 숨소리, 비단이 카펫 위를 스치는 소리.
"보옥아."
가모였다. 할머니는 자정이 넘어도 잠들지 않는 날이 많았고, 그런 날에는 꼭 이 거실을 순찰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은 잠옷이 아니라 옥색 실크 한복 저고리였다. 새벽 두 시에 그것을 걸친 채 거실을 거닐면서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가보옥은 그 점을 사랑했고, 그 점이 때로 무서웠다.
"할머니, 주무셔야죠."
"너나 자거라. 남자가 밤새 유리창 앞에 서 있으면 귀신 들린다."
보옥은 이마를 유리에서 떼고 뒤돌아봤다. 할머니는 이미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앉는 동작을 본 사람이 없는데 앉아 있는 것이었다. 배우다 못해 이제는 배우인지 사람인지 구분이 안 가는 경지. 할머니의 모든 동작에는 그런 데가 있었다. 칠십 년의 연습이 빚은 자연스러움.
"뭐 드릴까요."
"됐어. 거기 앉아봐."
보옥은 할머니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거실은 넓었다. 스위스에서 공수해온 러그가 깔려 있고, 그 위에 낮은 테이블이 놓여 있고, 테이블 위에는 오늘 저녁 누군가 가져다 놓은 과일 바구니가 아직 그대로 있었다. 어느 임원의 아내가 보낸 것이었는데, 과일들이 너무 고르고 윤기가 흘러서 오히려 먹기가 망설여지는 종류였다.
"잠이 안 와?"
"그냥 강 봤어요."
"강이 뭐 어쩐대?"
"흘러가요."
할머니는 보옥을 잠시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연민인지 당혹인지, 아니면 그 두 가지가 합쳐진 제3의 감정인지, 보옥은 평생 그걸 정확히 읽지 못했다.
"내일 아침에 네 아버지 전화 온다."
"알아요."
"이사회 건이야. 또 빠지면 안 돼."
"알아요."
할머니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가정의의 명령이 총이라면 가모의 말은 물이었다. 어디로 스미는지도 모르게 스미다가, 어느 순간 이미 흠뻑 젖어 있는 것이었다.
"자거라."
할머니가 일어섰다. 또 아무도 그 동작을 보지 못했는데 이미 일어나 있었다. 복도로 사라지는 그녀의 등 뒤에서 실크 한복 자락이 마지막으로 한 번 부드럽게 흔들렸다. 보옥은 그 잔상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유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은 여전히 흘렀다.
그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벽에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거실 한쪽을 거의 다 차지하는 대형 캔버스에, 바스키아의 작품이었다. 진짜였다. 보옥이 아는 한 이 집에서 진짜라고 확신할 수 있는 물건 중 하나. 왕관 같기도 하고 해골 같기도 한 형태들이 강렬한 원색 위에 겹쳐져 있었고, 그 옆, 정확히 그 옆에는 액자가 하나 더 걸려 있었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 무게감 있는 금속 프레임. K대학교 졸업증명서. 가보옥. 문학부.
보옥은 그 졸업장을 향해 잠깐 시선을 줬다가 거뒀다.
3학년 1학기를 마친 뒤 자퇴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나머지는 사실이 아니었다. 졸업장은 아버지 가정의가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떤 가격에 마련한 것인지 보옥은 물어본 적 없었고, 앞으로도 물어볼 생각이 없었다. 그 경로에 대해 알게 되면 그 이후로 그것을 계속 액자에 걸어둬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모르는 채로 그냥 걸어두면 됐다. 바스키아 옆에. 진짜 옆에 가짜를. 그게 이 집의 미학이었다.
보옥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천장을 봤다. 천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집 천장은 항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3.8미터 높이에서 침묵하는 법을 알고 있는 천장.
어디선가 진동이 왔다. 핸드폰이 테이블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보옥은 눈을 감은 채 손을 뻗어 화면을 확인했다.
수아: 오빠 자요?
보옥은 화면을 덮어놨다. 수아는 지난달에 만난 여자였는데, 정확히 어떤 경위로 만났는지 생각해보면 저녁 식사 자리에 누군가 데려온 것이었고,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를 생각해보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수아는 예뻤다. 말도 잘했다. 보옥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어했는데, 그것이 문제였다. 좋은 것만 보여주려는 사람과 있으면 보옥은 시야가 좁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핀 조명 아래서 연기하는 것처럼.
핸드폰 화면이 꺼졌다. 어두워진 거실에서 한강의 불빛만이 유리 너머로 흘렀다.
보옥은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을 만날 때 자신이 무언가를 연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보옥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었는데, 그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는 상황에 따라 달랐다. 할머니 앞에서는 사랑스러운 손자, 아버지 앞에서는 아직 덜 완성된 후계자, 수아 같은 여자들 앞에서는 낭만적이지만 범접하기 어려운 재벌 2세. 역할들은 많았고 각각 나름의 대사가 있었다. 문제는 혼자 있을 때 어느 쪽이 진짜인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지금. 새벽 두 시의 47층. 한강이 보이는 통유리 앞. 이 장면에서 가보옥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어야 하는가.
그는 몰랐다.
아침 일곱 시 정각에 전화가 왔다.
벨소리가 울리기 전에 이미 눈이 떠져 있었다. 그것이 이상했다. 알람을 맞춘 것도 아닌데, 몸이 알고 있었다. 일곱 시에 전화가 온다는 것을. 그리고 그 전화가 누구에게서 오는지.
가정의. 아버지.
보옥은 소파에서 잠들었던 것 같았다. 목이 뻐근했다.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보니 수아의 메시지가 두 개 더 와 있었고, 그 아래로 아버지의 이름이 떴다.
그는 전화를 받았다.
"나야."
아버지의 목소리는 항상 그랬다. '나야'로 시작하는 것. 보옥은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가 '보옥아'로 시작하는 전화를 받은 기억이 없었다. 언제나 '나야'. 마치 세상에 전화를 거는 존재는 하나뿐이라는 듯이.
"네."
"이번 달 28일 이사회. 10시."
"네."
"지난번처럼 되면 안 돼."
지난번. 보옥은 두 달 전 이사회를 사전 통보 없이 빠진 일을 생각했다. 그날 그는 대치동의 한 카페에서 혼자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고 있었다. 이사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가기 싫었고, 가지 않았다.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저는 오늘 이사회에 가면 또 제가 누군지 모르게 될 것 같아서요. 그런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가정의와 보옥 사이의 언어에는.
"28일. 알겠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잠깐 멈췄다. 그 멈춤의 질감이 보옥은 싫었다. 마치 파일을 선택하고 열기 버튼을 누르기 전의 0.3초 같은 침묵.
"보채 씨 쪽이랑 일정 조율 중이야. 다음 달에 가족 상견례 형식으로 식사 자리 하나 잡을 거니까."
"……"
"들어?"
"들어요."
"됐어."
전화가 끊겼다. 보옥은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통화 시간. 1분 12초. 아버지와의 대화는 대체로 그 정도였다. 길어봐야 2분. 그 안에 들어가야 할 것들이 있었고,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있었다. 보옥은 후자 쪽에 속했다.
설보채. 이름을 속으로 한 번 불러봤다. 실체가 없는 이름이었다. 한 번 인사를 나눈 적 있는데, 그때 그녀는 완벽했다. 말이, 표정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의 조율이. 흠잡을 데가 없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인 사람. 보옥은 그 완벽함 앞에서 무언가를 연기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관심 있는 남자를 연기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게 해냈을 것이다.
그는 일어나 욕실로 갔다.
거울 앞에서 보옥은 잠시 자신의 얼굴을 봤다. 새벽에 유리에 기댔다가 소파에서 구겨진 채 잠들었다가 일어난 얼굴이었는데, 그런데도 나쁘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불행 중 하나였다. 어떤 상태로 있어도 괜찮아 보이는 얼굴. 그래서 아무도 그가 괜찮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차가운 물이 손바닥에 고였다가 흘렀다. 그는 그 물을 얼굴에 덮어씌우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눈을 감으면 한강이 보였다. 새벽의 검은 강. 조용히 자기 일을 하는 강.
언젠가, 아주 오래전에 아버지가 한 말이 있었다.
한강은 서울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옥의 손을 잡고 강변을 걸었던 날. 그날의 아버지는 지금과 달랐다. 아니, 달랐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그때도 같았는데 보옥이 어려서 달라 보였던 것일 수도 있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보옥은 그 생각을 접었다.
28일. 이사회. 그리고 상견례.
그는 대충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한강은 낮에 봐도 흘렀다. 아침 햇살 아래 반짝이며, 밤보다 더 선명하게, 자기 갈 방향으로. 보옥은 커피머신 앞에 서서 캡슐을 넣고 버튼을 눌렀다. 기계가 낮은 소리를 냈다. 잠시 후 커피 향이 번졌다.
이 집에서 진짜인 것들. 바스키아 그림. 할머니의 한복 자락이 카펫을 스치는 소리. 아버지의 1분 12초. 새벽의 한강.
보옥은 커피 잔을 들고 유리 앞으로 걸어갔다. 아침의 서울이 펼쳐져 있었다.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나 오늘 하루를 시작할 이유를 찾고 있을 것이었다.
47층의 유리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것도 알고 있었다. 처음 이 층에 이사 왔을 때부터. 이 집에는 바깥으로 통하는 창문이 단 하나도 없었다. 전망은 있었다. 환기는 기계가 했다. 바람은 들어오지 않았다.
보옥은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혀끝이 살짝 데였다.